‘대기업 홈페이지에는 왜 게시판이 없을까?’ 기업을 대표하는 광고모델이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고 현란한 플래시 애니메이션까지 곁들여진 대기업 홈페이지에는 볼거리들이 넘쳐난다. 회사소개, 제품정보,
고객지원 등 필요한 정보가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꼭 필요한 기능 한가지가 모두 약속한 것처럼 빠져 있다.
‘우리 게시판에 글 올리지마’
대기업 홈페이지에는 게시판이 없다. 처음부터
없었을까? 왜 없을까. 그렇다면 해당 기업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네티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시라. 소비자
불만사항은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로 접수하면 된다. 그래도 불편하고 찜찜한 느낌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전화를
걸 거였다면 아예 홈페이지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이메일은 제대로 전달됐는지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다. 홈페이지를 방문한
네티즌들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게 하면 훨씬 간단할 텐데 굳이 게시판을 없앤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혹시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2002년 말 경기도 용인구성 삼성래미안 1차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있던 이갑영씨는 사전점검을
위해 공사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소장은 내장공사까지 거의 마무리된 상태라고 설명했지만 국내 최고의 아파트를 짓는다는 래미안의
명성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실시공에 이씨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가진 입주자들과 삼성물산 래미안
홈페이지에 있는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주자들끼리 부실시공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는지 어느날 갑자기 게시판을 모두 폐쇄됐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입주자들을 이끌고 다음카페로 옮겨갔다 네티즌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메인을 확보하고 ‘안티 래미안’(anti-raemian.co.kr) 사이트를
열었다.
삼성물산 래미안의 사례는 소비자들의 정보공유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기업이 게시판을 없앴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노중균 교수는 “삼성전자 홈페이지에서 소비자들의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란이 있는지 확인해본
적이 있는데 한참만에 게시판 대신 웹진이라는 걸 찾았다”며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소비자들의 불만을 잘만 활용하면 굳이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연구하네 뭐하네 쓸데없이 돈 쓰는 일은 없을 텐데 왜 게시판을 없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게시판을 없애면 잦아들 줄 알았던 네티즌들의 정보공유는 더 광범위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의 막강한
힘에 대립각을 세우는 대안으로 안티사이트가 우후죽순 등장했고 이 과정에 네티즌과 기업 사이에 도메인 확보전쟁이 벌어진다.
기업의 안티도메인을 선점한 뒤 흥정을 통해 되팔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안티도메인 확보경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도메인 등록대행업체 ‘아사달’ 이경용 대리는 “쓸모있는 도메인을 골라 집중적으로 매입하는
전문 사냥꾼의 비율은 전체 도메인 등록자의 40%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보유한 도메인은 전체의 60%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안티도메인만을 노리는 사냥꾼도 적지 않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안티도메인 확보에 ‘혈안’
대기업은 이들 사냥꾼이 수집한 도메인도 가능하면 확보하려
든다. 안티사이트는 ‘싹’부터 잘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기업과 사냥꾼들 사이에 실제 거래가 성사되는 건수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한 대기업의 도메인 등록을 전담하고 있는 업체의 관계자는 “기업에서는 안티도메인 한개에 200만~300만원을
생각하지만 소유주는 보통 1000만원 이상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금액이 차이가 나면 거래는 이뤄지지 않는다.
안티도메인 사냥꾼이 직접 나서서 안티사이트까지 운영하는 예는 드물기 때문에 기업측에서 매달리는 일은 거의
없다.
대기업과 사냥꾼의 틈바구니에서 안티사이트를 운영하려는 실수요자들의 도메인 확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네티즌은 뒷거래까지 하면서 안티도메인을 ‘싹쓸이’하려는 기업의 행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소비자의
목소리는 아예 듣지 않겠다는 오만함이라고 질타한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KT의 인터넷 종량제 도입 시도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노KT(nokt.co.kr)’ 자유발언대에 사이트
접속이 안 된다는 글이 지난달 말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KT의 초고속인터넷 상품인 ‘메가패스’ 사용자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서 KT가 안티사이트 접속을 인위적으로 막고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됐다. 금세 회원들 사이에는 험한 말이
오가면서 KT를 성토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하지만 곧 해프닝으로 결론이 났다.
“기업이 바뀔 때까지 우리는 간다”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업들이 안티도메인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안티사이트를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대부분의 안티사이트는 기업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소비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사회운동의 공간으로 건전한 활동에 힘을 쏟는 편이다.
‘안티SK텔레콤(antisktelecom.com)’
운영자 김종희씨는 개설동기를 묻는 질문에 “단순히 SK텔레콤을 비방하거나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 여러 가지 생각을 공유해
피해를 줄이고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노KT’ 운영자 정종훈씨도 “안티사이트는 인터넷문화를
기반으로 국민들에게 알권리를 제공하는 뜻깊은 장소”라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굽히지 않고 계속 이끌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안티사이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비슷한 이유를 댄다.
‘안티LG전자(antilg.com)’
사이트를 계획하고 있는 이승훈씨도 ‘건전한 안티’ 가운데 한 명이다. 2004년 10월 무선전화기를 고치기 위해
서비스센터를 찾은 이씨는 1500원에 불과한 부품가격을 4000원이라고 속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항의했지만 본사 고객상담실의
담당과장은 “고객이 4000원에 샀으면 문제가 되지만 사지 않았기 때문에 거래가 성립되지 않아 책임이 없다”는 어이없는
대답만 반복했다. 세계적인 기업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나 싶어 안티엘지카드를 운영하던 이에게 40만원에 도메인을 양도받고
어려운 길에 나섰다. 그는 “기업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선 안티사이트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 강조했다.
안티도메인 ‘큰손’ 삼성과
현대차
대기업의 안티도메인 보유현황을 보면 단연 삼성이 눈에 띈다. 삼성의 안티도메인들은
계열사인 ‘삼성네트웍스’와 ‘유니텔’이 소유주로 등록돼 있다. ‘antisamaung’이나 ‘nosamaung’으로
시작되는 대부분의 도메인과 한글도메인을 선점해 안티사이트가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노조탄압을 위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삼성SDI와 관련된
‘안티SDI(antisdi.com)’와 ‘안티애니콜(antianycall.org)’, ‘안티래미안’ 정도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은 개인이 등록한 도메인을 매입에도 가장 적극성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진다. 4월 23일 선점됐던
한글인터넷주소 ‘안티삼성전자’도 6월 7일 매입을 완료했다. 안티도메인 가운데 ‘대어’급으로 평가되던
‘antisamsung.com’은 2000만원에 삼성이 인수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잡는 것이 많은 만큼
놓치는 도메인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한때 안티사이트로 운영됐으나 조용히 사라진 ‘ngsamsung.co.kr’은 7월
28일 한 개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ngsamsung’관련 모든 도메인은 삼성네트웍스가 차지하고 있는
상태다. 2001년 10월에는 삼성의 그물망에서 새나간 안티도메인 3개를 한 개인이 재등록한 일도 있었다. 안티삼성닷컴에
버금가는 ‘월척’급 도메인들로 아직까지 안티사이트로 발전하지는 않은 상태다. 이 도메인들의 소유주인 최모씨는 “직접
안티사이트를 운영할 생각은 없지만 삼성이 사들인다고 해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요즘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력 위에
군림하는 삼성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누구라도 의미있는 일에 쓴다면 도메인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안티도메인 개수에서는 현대자동차가 삼성을 앞선다. 회사명과 관련된 도메인 뿐 아니라 새롭게 출시되는 자동차의
안티도메인들도 모두 사들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라는 특성 때문에 안티와 함께 ‘안타(anta)’도메인도 선점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는 적어도 새 자동차 모델이 나오기 3개월 전부터 도메인 확보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발빠르게 대응하다보니 삼성보다 손실이 적은 편이다.
‘antihyundaimotor.com’와
‘안티현대자동차’ 한글도메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안티도메인을 챙겼다. 반면 자매기업인 기아자동차의 안티도메인들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거나 주인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LG나 GS, SK텔레콤, KT 등은 안티도메인 확보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대부분 개인이 선점했거나 아직 소유주가 없는 도메인이 많다.
SK텔레콤 홍보1팀 원홍식
차장은 “안티사이트도 하나의 채널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굳이 도메인까지 확보해가며 막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KT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안티사이트의 종류에 따라 대응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부족한 부분에 문제제기하는 건 좋다고 본다”면서
“기업의 이미지에 심각한 위해를 입히거나 불매운동이 벌어진다면 법무팀에 의뢰해서 처리하겠지만 현재로선 안티사이트에 대한
법률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